서운함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하루

나이 먹을 수록 누군가에게 섭섭함을 말하는 게 힘들다.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 누구든 상관없이 말이다. 체할 것처럼 나이만 꼬박꼬박 먹어간다. 쳐먹은 나이 만큼 알아가는 사람의 범위는 넓고 풍성해졌는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 

시간이 흐르고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녀석들은 군대에 가거나 대학을 졸업하거나 취업시장에 내몰렸다. 누군가는 번듯한 학교 나와 취직을 하지 못해 연락이 끊기고, 눈 맞은 여자와 결혼해서 연락이 끊기고. 친구의 여자친구와 바람을 피워서 연락이 끊기고. 뭐 그랬더랬다.

삶의 풍경이 고속도로처럼 휙휙 지나가는데, 나 혼자 완행열차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조급증이 머리를 쳐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어져 갔다. 세월의 풍경은 무시무시하게 빨랐고, 겁을 쳐먹은 나는 절름발이처럼 걸었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더이상 뒷걸음질 칠 곳이 없을 때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허둥거리고 삐걱대기만 했던 내게, 부모님이 답답함과 섭섭함을 내비추지 못한 건, 그냥 당신들이 나의 부모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줄자,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말하는 일도 줄었다. 남자라서도 아니고, 쿨하고 싶어서도 아닌데. 10대에는 곧잘 친구들에게 징징거리며 서운함을 토로하곤 했었는데. 

쿨한 사람과 쿨하지 못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쿨하지 못한 사람은 의지와 무관하게 찌질이가 되고 만다는 걸 알게 된 후 앞가림은 스스로 하는 거지, 라며 자위했다. 

장례식에서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옛 친구에게 왜 연락 안 했냐고 투덜거렸는데, 대뜸 미안하다고 했다. 앞으로도 속상할 일이 많고 서운한 일이 생길 텐데 그 때는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다. 근데 그 친구는 외국으로 나간다고 했다. 썅.

모면하는 삶 작문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머니께서 수술을 하셨다. 죽음을 넘나들던 대수술이었다. 수술이 잘 끝났음에도 면회가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간신히 허락된 20분의 면회 시간. 하지만 중환자 실 내에 있는 무균실의 면회 준비는, 그 자체로 우울함을 가중시켰다. 흡사, 수술 집도의처럼 초록 가운과 비닐장갑을 끼고 몸은 소독약으로 범벅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보호자들로 하여금, '환자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면 분명히, 실낱 같은 희망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삐걱대는 중환자실 문을 열었을 때 문 틈으로 보이던 어머니의 처참한 모습에 일순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분명히,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라처럼 손발이 퍼렇게 질려있었고, 얼굴은 앙상하다 못해 처참했다. 아버지께서는 "엄마가 아들 보고 싶어했으니 어서 가보라고" 등을 떠 밀었는데 병실 안에서 손짓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문자 그대로, 무섭고 이상해서 "우리 엄마 아냐!"라고 소리치고는 도망쳐나왔다.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후에 저 얘기를 해주셨다. 중환자실 보호자들의 절망과 시름만 어렴풋 기억하고 있던 내게 그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너무나 서운하고, 섭섭했다" 했다. "병원에서 며칠 밤낮을 우셨다"고도 했다. 

 아마, 삶을 부정당한 기분이었을까. 가늠할 뿐이다. 천만에. 역시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후회된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살아서일까, 난 삶을 되돌리고 싶으면 대단할 것 없던 저때로 돌아가고 싶다. 

 주어진 일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고 꾀를 내 도망가는 걸 모면이라고 하는데, 내 삶은 정확히 모면하는 삶이었다. 학교에서도, 알바에서도, 군대에서도, 심지어 회사에서도 삶의 모토는 한결같았다. 위험과 불이익을 감지하는 더듬이를 움직이며 약삭빠르게 이득과 피해를 재며 살았다. 

 그 결과 도망만 칠 줄 하는 인간이 됐다. 악착같이 살고 싶었던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으나, 끊임없이 성찰하고 돌이키면서 되돌려 보려고 했으나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아직도 하루 하루 모면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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